[주의!] 문서의 이전 버전(에 수정)을 보고 있습니다. 최신 버전으로 이동
\#ffffff '''{{{+2 개황력}}}'''[br]'''開皇曆 / 開皇錄''' | |
저자 | 미상 |
제작 국가 | 파일:대한민국 국기.png 가야 또는 신라 (추정) |
제작 시기 | 미상 (6세기 ~ 10세기 경 추정) |
형태 | 문헌 (역사서) |
현재 상태 | 소실됨 |
목차
== 개요 ==
개황력(開皇曆)은 고려 시대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 편에 인용된, 금관가야의 역사를 다룬 가야계 사서이다.[* 나무위키 - 개황력] 현재까지 그 존재가 알려진 가야계 역사서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유사》에는 '개황록(開皇錄)'이라는 이름으로도 혼용되어 표기되어 있다.[* 나무위키 - 개황력 (r19 판)]
원래의 책은 현재 모두 실전되어 찾아볼 수 없으며, 오직 《삼국유사》에 인용된 단 두 줄의 문장만이 남아있는 형태의 로스트 미디어이다.[* 나무위키 - 개황력 (r19 판)]
== 상세 기록 ==
현재 전해지는 개황력의 원문 내용은 《삼국유사》에 인용된 다음의 두 문장이 전부이다. 가야사와 관련된 독자적인 문헌 기록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나무위키 - 개황력 (r19 판)]
- 《삼국유사》 제1권 왕력 편:
≪개황력(開皇曆)≫에는 “성(姓)은 김씨(金氏)이니 대개 시조(始祖)가 금란(金卵)에서 난 까닭에 김을 성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開皇暦云 “姓金氏, 盖國世祖從金卵而生, 故以金爲姓厼.”)
- 《삼국유사》 제2권 기이 가락국기 구해왕 편:
≪개황록(開皇錄)≫에 보면, “양(梁)나라 무제(武帝)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532년)에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開皇録云, “梁中大通四年壬子降于新羅.”)
설화성이 짙은 가락국기에 인용되었다는 점에서 개황력 원본 역시 설화적인 성격이 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무위키 - 개황력 (r19 판)]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개황력을 인용한 흔적이 없는 이유도, 이러한 설화적 내용이 김부식의 유교적 합리주의(괴력난신을 배격함) 관점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나무위키 - 개황력 (r19 판)]
== 수색 및 사본 존재 논란 ==
개황력 원본은 실전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2008년 양산문화원에서 발행한 『취서사지』라는 책의 부록에 개황력의 해설서가 수록되면서 학계와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나무위키 - 개황력 (r17 판)]
양산문화원이 『취서사지』를 집필하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던 중, 1960년대까지 전라도 지역에 개황력의 사본이 남아 있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한다.[* 나무위키 - 개황력 (r17 판)] 그러나 사본 자체는 이미 실전된 뒤여서 확보하지 못했고, 대신 경상남도 밀양에 거주하는 한 김 모 씨가 해당 사본의 '해설서'만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여 이를 부록에 실었다.[* 나무위키 - 개황력 (r17 판)]
하지만 이 해설서는 원본과의 교차검증이 불가능하여 그 진위 여부가 불투명하다. 특히 이 해설서에서는 개황력이 서기 201년에 집필되었으며, '개황(開皇)'이라는 제목이 김수로왕의 독자적인 연호(원년은 서기 42년)라고 주장한다.[* 나무위키 - 개황력 (r19 판)] 그러나 이는 《삼국유사》에 인용된 개황록 원문에 가야가 멸망한 해인 532년의 기록이 등장하는 것과 정면으로 모순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신뢰하기 어려운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나무위키 - 개황력 (r19 판)]
== 집필 시기 가설 ==
남아 있는 원본 기록이 책 제목과 단편적인 두 문장이 전부이므로, 정확히 누가 언제 이 책을 집필했는지에 대해서는 학계와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여러 가설이 제기되고 있다.[* 나무위키 - 개황력 (r19 판)]
- 서기 581~600년 집필설 (수나라 연호설):'개황'이라는 이름이 중국 수나라 고조 시대의 연호(581~600년)와 일치한다는 점에 착안한 가설이다.[* 나무위키 - 개황력 (r17 판)] 이 해석에 따르면 금관가야가 멸망하여 신라에 편입된 이후인 신라 진평왕 시기쯤에 쓰인 책이 된다. 그러나 6세기 후반 당시 신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가야사를 서술하면서 굳이 수나라의 연호를 책 제목으로 사용할 이유가 부족하다는 학계의 지적이 존재한다.[* 나무위키 - 개황력 (r17 판)]
- 7세기 중후반 신라 중대설:한자 '開皇'을 '황제국(황실)을 열었다'는 뜻으로 직역하는 견해이다.[* 나무위키 - 개황력 (r17 판)] 이는 금관가야를 황제국으로 높인 표현인데, 김해 김씨(가야계)들이 선조를 이렇게까지 높일 수 있었던 시기는 가야계 후손인 김유신이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그들의 위상이 최고조에 달했던 삼국통일 전후(7세기 중후반)일 것이라는 가설이다.[* 나무위키 - 개황력 (r17 판)]
- 나말여초 (후삼국시대) 혼란기설:마찬가지로 '황제국을 열었다'는 도발적인 표현에 주목한 가설이다.[* 나무위키 - 개황력 (r17 판)] 신라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무너진 후삼국 시대의 혼란상 속에서, 김해 지역의 신김씨 호족 후손들이 자신들이 과거 왕손이었음을 강력하게 과시하기 위해 조상을 높여 쓴 책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나무위키 - 개황력 (r17 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