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 요청하신 대로 기존 위키 사이트의 서술을 그대로 가져오지 않고, 역사적 사실과 커뮤니티의 추적 내용들을 바탕으로 완전히 새롭게 윤문하여 작성했습니다. 또한 나무위키 등 외부 위키의 출처 링크는 모두 제거하고, 문헌 자체에 대한 설명 위주로 각주를 구성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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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5 | [[분류:형태/문헌]][[분류:상태/소실됨]][[분류:국가/대한민국]][[분류:시기/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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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 ||\<-2\>\<table align=right\>\<table width=480\>\<table bordercolor=gray\>\<bgcolor=gray\>\<table bgcolor=white,\#1c1d1f\> {{{\#ffffff '''{{{+2 개황력}}}'''[br]'''開皇曆 / 開皇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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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 ||\<width=30%\>\<colbgcolor=gray\>\<colcolor=\#ffffff\> '''저자''' ||미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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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width=30%><colbgcolor=gray><colcolor=#ffffff> '''저자''' ||미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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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 8 | || '''제작 국가''' ||[[파일:대한민국 국기.png|width=25]] 가야 또는 신라 (추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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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 | || '''제작 시기''' ||미상 (6세기 \~ 10세기 경 추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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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 || '''제작 시기''' ||미상 (6세기 ~ 10세기 경 추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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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 10 | || '''형태''' ||문헌 (역사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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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11 | || '''현재 상태''' ||[include(틀:소실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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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 12 | [목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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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 13 | [clearfix]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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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 |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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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 | '''개황력(開皇曆)'''은 고려 시대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 편에 인용된, 금관가야의 역사를 다룬 가야계 사서이다.[\* [[[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나무위키 - 개황력]]] 현재까지 그 존재가 알려진 가야계 역사서 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유사》에는 '개황록(開皇錄)'이라는 이름으로도 혼용되어 표기되어 있다.[\* [[[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rev=19](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rev=19)|나무위키 - 개황력 (r19 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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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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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 '''개황력(開皇曆)'''은 금관가야의 역사를 기록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역사서이다. 현재 원본은 전혀 전해지지 않는 상태이며, 오직 고려 시대 일연이 펴낸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인용된 짧은 두 구절을 통해서만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로스트 미디어이다.[* 《삼국유사》 내부에서는 '개황록(開皇錄)'이라는 명칭과 혼용되어 기록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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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 | 원래의 책은 현재 모두 실전되어 찾아볼 수 없으며, 오직 《삼국유사》에 인용된 단 두 줄의 문장만이 남아있는 형태의 로스트 미디어이다.[\* [[[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rev=19](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rev=19)|나무위키 - 개황력 (r19 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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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 가야의 역사를 다룬 독자적인 사료가 극히 드문 상황에서, 이 책은 현전하는 기록 중 가야계의 시각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 꼽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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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 1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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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 | \== 상세 기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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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 | 현재 전해지는 개황력의 원문 내용은 《삼국유사》에 인용된 다음의 두 문장이 전부이다. 가야사와 관련된 독자적인 문헌 기록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rev=19](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rev=19)|나무위키 - 개황력 (r19 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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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 == 남은 기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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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 현재 우리가 알 수 있는 개황력의 원문은 《삼국유사》에 단편적으로 수록된 다음의 두 문장이 전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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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 | * 《삼국유사》 제1권 왕력 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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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 '''시조의 탄생 설화''' (《삼국유사》 제1권 왕력 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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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 | > ≪개황력(開皇曆)≫에는 “성(姓)은 김씨(金氏)이니 대개 시조(始祖)가 금란(金卵)에서 난 까닭에 김을 성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開皇暦云 “姓金氏, 盖國世祖從金卵而生, 故以金爲姓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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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 ≪개황력(開皇曆)≫에 이르기를 “성은 김씨(金氏)이다. 대개 나라의 시조가 금란(金卵)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김(金)을 성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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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 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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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 | * 《삼국유사》 제2권 기이 가락국기 구해왕 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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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 '''금관가야의 멸망 시기''' (《삼국유사》 제2권 기이 가락국기 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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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 | > ≪개황록(開皇錄)≫에 보면, “양(梁)나라 무제(武帝)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532년)에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開皇録云, “梁中大通四年壬子降于新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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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 ≪개황록(開皇錄)≫에 이르기를, “양(梁)나라 무제(武帝)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532년)에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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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 | 설화성이 짙은 가락국기에 인용되었다는 점에서 개황력 원본 역시 설화적인 성격이 강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rev=19](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rev=19)|나무위키 - 개황력 (r19 판)]]]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개황력을 인용한 흔적이 없는 이유도, 이러한 설화적 내용이 김부식의 유교적 합리주의(괴력난신을 배격함) 관점에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있다.[\* [[[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rev=19](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rev=19)|나무위키 - 개황력 (r19 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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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 이 두 구절을 통해 볼 때, 개황력은 김수로왕의 탄생 신화부터 532년 구해왕이 신라에 항복하며 국가가 멸망하기까지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다룬 사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개황력을 인용한 흔적이 없는데, 이는 유교적 합리주의를 지향했던 김부식이 신이한 탄생 설화가 담긴 개황력을 정사(正史)의 자료로 채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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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 | \== 수색 및 사본 존재 논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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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 | 개황력 원본은 실전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2008년 양산문화원에서 발행한 『취서사지』라는 책의 부록에 '''개황력의 해설서'''가 수록되면서 학계와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uuid=a52a1791-6823-4af9-88ba-b283267b4c00](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uuid=a52a1791-6823-4af9-88ba-b283267b4c00)|나무위키 - 개황력 (r17 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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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 == 사본 수색 및 위서 논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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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 개황력은 오랫동안 완전히 실전된 것으로 여겨졌으나, 2008년 경상남도 양산문화원이 발행한 『취서사지(鷲棲寺誌)』 부록에 갑작스럽게 '개황력 해설서'가 수록되면서 학계와 역사 커뮤니티의 큰 주목을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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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 3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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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 | 양산문화원이 『취서사지』를 집필하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던 중, 1960년대까지 전라도 지역에 개황력의 사본이 남아 있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고 한다.[\* [[[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uuid=a52a1791-6823-4af9-88ba-b283267b4c00](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uuid=a52a1791-6823-4af9-88ba-b283267b4c00)|나무위키 - 개황력 (r17 판)]]] 그러나 사본 자체는 이미 실전된 뒤여서 확보하지 못했고, 대신 경상남도 밀양에 거주하는 한 김 모 씨가 해당 사본의 '해설서'만을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여 이를 부록에 실었다.[\* [[[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uuid=a52a1791-6823-4af9-88ba-b283267b4c00](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uuid=a52a1791-6823-4af9-88ba-b283267b4c00)|나무위키 - 개황력 (r17 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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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 당시 양산문화원 측의 자료 수집 과정에 따르면,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전라도 지역의 한 사찰에 개황력의 필사본이 보관되어 있었다는 구전이 존재했다고 한다. 수색팀은 이 소문을 추적했으나 원본이나 사본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 대신 경남 밀양에 거주하는 한 개인이 해당 사본의 내용을 풀이한 '해설서'를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이를 책에 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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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 | 하지만 이 해설서는 원본과의 교차검증이 불가능하여 그 진위 여부가 불투명하다. 특히 이 해설서에서는 개황력이 서기 201년에 집필되었으며, '개황(開皇)'이라는 제목이 김수로왕의 독자적인 연호(원년은 서기 42년)라고 주장한다.[\* [[[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rev=19](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rev=19)|나무위키 - 개황력 (r19 판)]]] 그러나 이는 《삼국유사》에 인용된 개황록 원문에 가야가 멸망한 해인 532년의 기록이 등장하는 것과 정면으로 모순되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신뢰하기 어려운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rev=19](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rev=19)|나무위키 - 개황력 (r19 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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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 '''위서 판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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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 그러나 이 해설서는 공개 직후 내용상의 치명적인 오류로 인해 학계로부터 철저히 외면받았다. 해설서에서는 개황력이 '''서기 201년'''에 쓰였으며, 책 제목인 '개황(開皇)'은 김수로왕이 사용한 '''가야의 독자적인 연호'''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삼국유사》에 명백히 남아있는 개황력 원문(532년 가야 멸망을 기록한 구절)과 시대적으로 완전히 모순된다. 결국 해당 해설서는 후대에 누군가 창작한 위서(僞書)이거나 엉터리 해석본으로 결론지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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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 4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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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 | \== 집필 시기 가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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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7 | | 남아 있는 원본 기록이 책 제목과 단편적인 두 문장이 전부이므로, 정확히 누가 언제 이 책을 집필했는지에 대해서는 학계와 인터넷 커뮤니티 등에서 여러 가설이 제기되고 있다.[\* [[[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rev=19](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rev=19)|나무위키 - 개황력 (r19 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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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 == 집필 시기에 대한 가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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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 원본이 없기 때문에 개황력이 정확히 언제, 누구에 의해 쓰였는지는 미궁에 빠져 있다. 문헌의 제목인 '개황(開皇)'이라는 단어의 해석을 두고 크게 세 가지 가설이 대립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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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 4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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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 | * '''서기 581\~600년 집필설 (수나라 연호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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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 | '개황'이라는 이름이 중국 수나라 고조 시대의 연호(581\~600년)와 일치한다는 점에 착안한 가설이다.[\* [[[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uuid=a52a1791-6823-4af9-88ba-b283267b4c00](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uuid=a52a1791-6823-4af9-88ba-b283267b4c00)|나무위키 - 개황력 (r17 판)]]] 이 해석에 따르면 금관가야가 멸망하여 신라에 편입된 이후인 신라 진평왕 시기쯤에 쓰인 책이 된다. 그러나 6세기 후반 당시 신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가야사를 서술하면서 굳이 수나라의 연호를 책 제목으로 사용할 이유가 부족하다는 학계의 지적이 존재한다.[\* [[[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uuid=a52a1791-6823-4af9-88ba-b283267b4c00](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uuid=a52a1791-6823-4af9-88ba-b283267b4c00)|나무위키 - 개황력 (r17 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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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 | === 6세기 후반 집필설 (수나라 연호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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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 | 가장 직관적인 가설로, '개황(開皇)'이 중국 수나라의 초대 황제인 문제(文帝)가 사용한 연호(581년 ~ 600년)라는 점에 착안한 주장이다. 이 시기는 금관가야가 멸망하고 신라에 편입된 직후의 시점으로, 옛 가야의 유민이나 신라로 편입된 가야계 귀족이 멸망한 조국의 역사를 정리하기 위해 당시 중국의 연호를 빌려 썼다는 가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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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 | 다만, 당시 신라는 '건원(建元)', '개국(開國)' 등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자주의식을 뽐내던 시기였으므로 굳이 가야사를 쓰며 중국 연호를 제목으로 삼았을 리 없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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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 | 4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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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 | * '''7세기 중후반 신라 중대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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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 | 한자 '開皇'을 '황제국(황실)을 열었다'는 뜻으로 직역하는 견해이다.[\* [[[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uuid=a52a1791-6823-4af9-88ba-b283267b4c00](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uuid=a52a1791-6823-4af9-88ba-b283267b4c00)|나무위키 - 개황력 (r17 판)]]] 이는 금관가야를 황제국으로 높인 표현인데, 김해 김씨(가야계)들이 선조를 이렇게까지 높일 수 있었던 시기는 가야계 후손인 김유신이 전쟁 영웅으로 추앙받으며 그들의 위상이 최고조에 달했던 삼국통일 전후(7세기 중후반)일 것이라는 가설이다.[\* [[[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uuid=a52a1791-6823-4af9-88ba-b283267b4c00](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uuid=a52a1791-6823-4af9-88ba-b283267b4c00)|나무위키 - 개황력 (r17 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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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 | === 7세기 중후반 집필설 (신라 중대 김유신 가문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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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9 | 한자어 '開皇'을 특정 연호가 아니라 '''"황제(皇)의 나라를 열다(開)"'''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가야의 군주를 황제로 격상시킬 수 있을 만큼 가야계 후손들의 권력이 강했던 시기를 찾는 가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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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7세기 중후반, 가야계인 김유신 가문은 무열왕계와 결탁하여 신라 조정의 최고 실세로 자리 잡았다. 이 시기에 김해 김씨 일문이 자신들의 핏줄인 가야 왕실의 정통성과 위상을 신라 왕실(황실) 못지않게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황제국'을 표방한 사서를 편찬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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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 | 5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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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 | | * '''나말여초 (후삼국시대) 혼란기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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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6 | | 마찬가지로 '황제국을 열었다'는 도발적인 표현에 주목한 가설이다.[\* [[[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uuid=a52a1791-6823-4af9-88ba-b283267b4c00](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uuid=a52a1791-6823-4af9-88ba-b283267b4c00)|나무위키 - 개황력 (r17 판)]]] 신라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무너진 후삼국 시대의 혼란상 속에서, 김해 지역의 신김씨 호족 후손들이 자신들이 과거 왕손이었음을 강력하게 과시하기 위해 조상을 높여 쓴 책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uuid=a52a1791-6823-4af9-88ba-b283267b4c00](https://namu.wiki/w/%EA%B0%9C%ED%99%A9%EB%A0%A5?uuid=a52a1791-6823-4af9-88ba-b283267b4c00)|나무위키 - 개황력 (r17 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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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 | === 나말여초 혼란기 집필설 (호족 대두기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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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 | 마찬가지로 '황제국을 열었다'는 파격적인 명칭에 주목하되, 그 시기를 신라 하대부터 고려 초기의 혼란기로 보는 가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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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4 | 신라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완전히 붕괴된 후삼국 시대, 옛 금관가야 지역인 김해 일대에서 성장한 지방 호족들이 지역민들을 규합하고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 김수로왕의 신화를 부풀려 스스로를 '황제국의 후손'으로 자처하기 위해 만들어낸 기록이라는 주장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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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7 | 5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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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 | 56 | [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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