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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황력(비교)

r4 vs r5
1요청하신 대로 기존 위키 사이트의 서술을 그대로 가져오지 않고, 역사적 사실과 커뮤니티의 추적 내용들을 바탕으로 완전히 새롭게 윤문하여 작성했습니다. 또한 나무위키 등 외부 위키의 출처 링크는 모두 제거하고, 문헌 자체에 대한 설명 위주로 각주를 구성했습니다.
22
33thetree 엔진 문법이 적용된 위키 문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1[목차]
24
3thetree 엔진 적용된 위키 문서음과 같습니다.
5제목의 개황(開皇)에 대해서는 수나라 제의 연호를 따온 것라는 주장도 있지만, 확실하지.
46
5[[분류:형태/문헌]][[분류:상태/소실됨]][[분류:국가/대한민국]][[분류:시기/미상]]
68||<-2><table align=right><table width=480><table bordercolor=gray><bgcolor=gray><table bgcolor=white,#1c1d1f> {{{#ffffff '''{{{+2 개황력}}}'''[br]'''開皇曆 / 開皇錄'''}}} ||
79||<width=30%><colbgcolor=gray><colcolor=#ffffff> '''저자''' ||미상 ||
......
1113|| '''현재 상태''' ||[include(틀:소실됨)] ||
1214[목차]
1315[clearfix]
7== 해설서의 발견 ==
149
15== 개요 ==
16'''개황력(開皇曆)'''은 금관가야의 역사를 기록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 역사서이다. 현재 원본은 전혀 전해지지 않는 상태이며, 오직 고려 시대 일연이 펴낸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인용된 짧은 두 구절을 통해서만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로스트 미디어이다.[* 《삼국유사》 내부에서는 '개황록(開皇錄)'이라는 명칭과 혼용되어 기록되어 있다.]
10하지만 이미 원본과 복사본은 소실되었고 이 내용을 바탕으로 한 해설서는 밀양에 살고 있는 김남철 씨가 가지고 있어 그 전문을 전달받아 취서사지 부록 3에 실리게 되었다. [[https://www.nculture.org/lib/libraryDetail.do?contentId=41324|보러가기]]
1711
18가야의 역사를 다룬 독자적인 사료가 극히 드문 상황에서, 이 책은 현전하는 기록 중 가야계의 시각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가장 오래된 문헌으 꼽힌다.
19
20== 남은 기록 ==
21현재 우리가 알 수 있는 개황력의 원문은 《삼국유사》에 단편적으로 수록된 다음의 두 문장이 전부이다.
22
23'''시조의 탄생 설화''' (《삼국유사》 제1권 왕력 편)
24
25≪개황력(開皇曆)≫에 이르기를 “성은 김씨(金氏)이다. 대개 나라의 시조가 금란(金卵)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김(金)을 성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2613
2714'''금관가야의 멸망 시기''' (《삼국유사》 제2권 기이 가락국기 편)
2815
2916≪개황록(開皇錄)≫에 이르기를, “양(梁)나라 무제(武帝) 중대통(中大通) 4년 임자(532년)에 신라에 항복하였다”고 하였다.
3017
3118이 두 구절을 통해 볼 때, 개황력은 김수로왕의 탄생 신화부터 532년 구해왕이 신라에 항복하며 국가가 멸망하기까지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다룬 사서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개황력을 인용한 흔적이 없는데, 이는 유교적 합리주의를 지향했던 김부식이 신이한 탄생 설화가 담긴 개황력을 정사(正史)의 자료로 채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3219
3320== 사본 수색 및 위서 논란 ==
3421개황력은 오랫동안 완전히 실전된 것으로 여겨졌으나, 2008년 경상남도 양산문화원이 발행한 『취서사지(鷲棲寺誌)』 부록에 갑작스럽게 '개황력 해설서'가 수록되면서 학계와 역사 커뮤니티의 큰 주목을 받았다.
3522
3623당시 양산문화원 측의 자료 수집 과정에 따르면, 1960년대까지만 해도 전라도 지역의 한 사찰에 개황력의 필사본이 보관되어 있었다는 구전이 존재했다고 한다. 수색팀은 이 소문을 추적했으나 원본이나 사본을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 대신 경남 밀양에 거주하는 한 개인이 해당 사본의 내용을 풀이한 '해설서'를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이를 책에 실었다.
3724
3825'''위서 판정:'''
3926그러나 이 해설서는 공개 직후 내용상의 치명적인 오류로 인해 학계로부터 철저히 외면받았다. 해설서에서는 개황력이 '''서기 201년'''에 쓰였으며, 책 제목인 '개황(開皇)'은 김수로왕이 사용한 '''가야의 독자적인 연호'''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삼국유사》에 명백히 남아있는 개황력 원문(532년 가야 멸망을 기록한 구절)과 시대적으로 완전히 모순된다. 결국 해당 해설서는 후대에 누군가 창작한 위서(僞書)이거나 엉터리 해석본으로 결론지어졌다.
4027
4128== 집필 시기에 대한 가설 ==
4229원본이 없기 때문에 개황력이 정확히 언제, 누구에 의해 쓰였는지는 미궁에 빠져 있다. 문헌의 제목인 '개황(開皇)'이라는 단어의 해석을 두고 크게 세 가지 가설이 대립하고 있다.
4330
4431=== 6세기 후반 집필설 (수나라 연호설) ===
4532가장 직관적인 가설로, '개황(開皇)'이 중국 수나라의 초대 황제인 문제(文帝)가 사용한 연호(581년 ~ 600년)라는 점에 착안한 주장이다. 이 시기는 금관가야가 멸망하고 신라에 편입된 직후의 시점으로, 옛 가야의 유민이나 신라로 편입된 가야계 귀족이 멸망한 조국의 역사를 정리하기 위해 당시 중국의 연호를 빌려 썼다는 가설이다.
4633다만, 당시 신라는 '건원(建元)', '개국(開國)' 등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자주의식을 뽐내던 시기였으므로 굳이 가야사를 쓰며 중국 연호를 제목으로 삼았을 리 없다는 반론도 존재한다.
4734
4835=== 7세기 중후반 집필설 (신라 중대 김유신 가문설) ===
4936한자어 '開皇'을 특정 연호가 아니라 '''"황제(皇)의 나라를 열다(開)"'''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가야의 군주를 황제로 격상시킬 수 있을 만큼 가야계 후손들의 권력이 강했던 시기를 찾는 가설이다.
5037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7세기 중후반, 가야계인 김유신 가문은 무열왕계와 결탁하여 신라 조정의 최고 실세로 자리 잡았다. 이 시기에 김해 김씨 일문이 자신들의 핏줄인 가야 왕실의 정통성과 위상을 신라 왕실(황실) 못지않게 높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황제국'을 표방한 사서를 편찬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5138
5239=== 나말여초 혼란기 집필설 (호족 대두기설) ===
5340마찬가지로 '황제국을 열었다'는 파격적인 명칭에 주목하되, 그 시기를 신라 하대부터 고려 초기의 혼란기로 보는 가설이다.
5441신라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완전히 붕괴된 후삼국 시대, 옛 금관가야 지역인 김해 일대에서 성장한 지방 호족들이 지역민들을 규합하고 자신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과거 김수로왕의 신화를 부풀려 스스로를 '황제국의 후손'으로 자처하기 위해 만들어낸 기록이라는 주장이다.
5542
5643[각주]
12[[분류:스트 미디어]][[분류:상태/소실됨]]